첫째는 북방기원설이다. 이 설은 20세기 전반 서구에서 불기 시작한 문화 단일기원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민족의 문화요소들 중 이른바 북방문화 요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에 기원을 둔다. 강원대학교의 주채혁 박사는 여기에서 의미하는 북방이란 동시베리아나 만주지역을 가리키며 현재 중국의 서쪽 즉 만리장성 연선(沿線)을 포함하는데 기본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중국 북쪽에서 왔다는 견해가 포함되는데 이는 주로 문헌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던 학설이다.
북방기원설의 주된 내용은 한민족은 언어·체질·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러한 특징은 알타이어족에서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알타이어족은 역사적으로 민무늬 질그릇을 쓴 청동기 사람이다.
주채혁 박사는 시베리아 생태환경으로 보아 시원적인 유목은 순록유목이고 ‘조선’이나 ‘고려’ 또는 ‘구르간’이라는 이름 자체가 또한 순록유목과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순록유목에 기원이 있다는 것은 수렵이나 어로 또는 채집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던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 그 주된 생업이 농업과 목축업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부업이 되는 가운데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식량생산자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가와 툰드라나 스텝 등의 고원 건조지대를 목축생산의 주무대로 삼는 순록유목생산자 출신계열들이 우리 민족의 고대 정복국가를 세우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채혁은 조선과 고려가 순록, 맥(고구려)이 너구리, 부여가 부이르(숫수달), 몽골이 엘벵키-너구리, 발해가 늑대 또는 이리, 단(檀)과 타타르가 수달, 솔롱고스가 ‘무지개’가 아닌 족제비과에 속하는 솔롱고(黃鼠狼)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했다.
또한 퉁그스족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알타이∼바이칼 사이의 사얀 산맥 소욘족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주 박사는 소욘족은 산 이름에서, 퉁구스 족은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종족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바이칼 호 지대라는 개활지로 진출하려면 상당한 힘의 축적이 전제되는데 알타이 산의 많은 부분이 해발 4천여 미터가 넘는 고산들로 형성되어 있어 외부침략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비옥한 땅들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인구가 증가되어 축적된 힘이 생기자 바이칼 지역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고 이들이 동쪽으로 ‘이끼의 길’을 찾아 이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미토콘드리아 DNA분석에 따른 이동로. |
유홍준은 기원전 1000년부터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불리는 무문토기 시대로 넘어가는 것에 주목했다. 무문토기는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이는데 빗살무늬토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한 가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 비해, 민무늬토기 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외에 붉은 간토기(홍도)와 구멍무늬토기(공열문토기), 검은 간토기(흑도),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등 다양화돼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죽음의 장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사용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퉁구스 계통의 예족과 맥족이라고 추정했다.
유홍준은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이들이 한반도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거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살아왔던 고아시아족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섬멸시키고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과 부여이다.
둘째는 ‘남북혼합설’로 우리나라 남쪽에서 보이는 남방 해양문화권의 문화요소들을 그 주된 증거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적 조사보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제기된 주장으로 구체적으로 한반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 솟대 등을 남방에서 전해진 문화 요소로 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농사를 지을 때 사용한 어깨삽 등도 남방기원설의 큰 근거로 설명한다. 즉 우리 문화는 북방에서 전파해 온 문화 요소와 남방에서 유래한 문화 요소들이 결합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청동기 문화의 특징은 구릉지대에 만들어진 원형 움집과 장방형 움집, 석관묘와 고인돌(支石墓)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석관묘를 만든 사람들은 유목민족 계통이고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벼 농경인들이다.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중국의 요령성, 산동성, 절강성 등 중국의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제주도까지 분포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九州)지방, 남쪽으로는 대만, 인도차이나 전역, 인도네시아 전역, 말레시아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고인돌은 남방으로부터 도입되었다는 주장이다.
한반도에서 경작되는 벼농사도 남방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벼농사의 고향은 열대 지방이라는 것이다. 김병모 박사는 한반도는 벼농사의 적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한반도에서 벼농사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불가능하지만 열대 지방에서는 1년에 4모작도 가능하다) 한반도의 청동기인들이 벼농사를 한 이유는 벼의 뛰어난 경제성 때문으로 추정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 북방유목민 추정 이동로, 한민족의 근간이 북방민족이라는 북방기원설은 한민족이 언어‧체질‧문화면에서 북방민족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월간중앙』〈역사탐험〉 2003년 7월). |
김병모 박사가 강조하는 것은 문화전통이 다른 북방 계열과 남방 계열의 주민이 한반도에 살게 되면서 사유세계의 혼선이 관찰된다고 주장했다. 유목민들의 신화 체계는 천손신화이고 농경인들의 신화는 난생신화인데 이 두 가지의 신화 요소가 한국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모두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조선과 부여는 천손신화, 고구려‧신라‧가야의 난생신화이다.
천손신화는 수직하강 구조이고 난생신화는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구조다. 기마민족의 천손신화의 주인공들인 박혁거세나 김알지·김수로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수직하강 구조이면서도 정작 알이나 동자로 태어나는 기술은 두 가지 신화의 요소가 혼합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출신의 허황옥이 해로로 가락국에 도착하여 김수로의 왕비가 된다. 아유타국은 갠지스 강에 있던 인도 전국시대의 도시국가이고 현대의 이름은 아요디아(Ayodhia)이라는 것도 남북혼합을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했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파사석탑은 허왕옥이 인도에서 올 때 갖고 왔다고 알려진 약간 붉은빛의 반문이 있는 돌탑이다. 멀리 이국으로 시집간 딸이 도중에 풍랑을 만나 되돌아오자 아버지가 풍랑을 가라앉게 해준다는 신비의 석탑을 배에 실어주어 무사히 김해까지 오게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허명철 박사는 석탑의 재료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도의 아유타 지방에서만 나는 파사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탑을 분해하여 원형대로 석고를 복원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모양이 삼각형이 안정형이 아닌 역삼각형으로 아래층이 좁고 위로 갈수록 넓고 큰 돌로 쌓이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우리나라에는 발견되지 않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축소형 스투파 즉, 불탑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허박사는 형태, 크기, 문양, 사리보관소, 석질, 탑명 등을 고려하여 이 탑이 인도에서 만들어 가져온 축소형 불탑임을 결론지었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불교를 직접 김해로 전파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자료인 것은 물론 남방계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거주했다는 것도 증빙한다는 것이다.2) 물론 허황후를 중국, 또는 한반도 서남해의 해양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남방계와 북방계의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함께 혼합되어 살게 되었다는 것이 남북혼합설의 주안점이다.
셋째는 본토기원설 즉 자생설이다. 한민족의 문화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선조들이 대대로 문화를 일궈 오면서 형성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즉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로 문화 단계를 거치면서 자체 발전해왔다는 견해로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주로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던 가설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북방식 장리2호 고인돌,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진 안악군 노암리 고인돌보다 70cm나 더 크다. 남방문화가 유입된 대표적 증거로 고인돌을 제시하고 있으나 일부학자들은 한국에서 역으로 남방으로 전파됐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
한반도에서 7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충북 단양의 금굴과 평양시 상원의 검은모루동굴에서 70만 년 전(북한은 새로운 측정 장치에 의한 측정법으로 재측정한 후 100만 년 전으로 소급하고 있음)의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고 계속하여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유적이 한반도와 만주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와 만주의 각지에서 70∼100만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석기 시대부터 비로소 현대인들의 선조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신석기시대 주민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후손이므로 구석기시대의 사람들도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윤내현 박사는 두개골에 대한 연구 결과도 본토기원설에 무게를 실어준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것과 주변 것의 평균관계편차는 중국 황하 유역 사람은 0.81, 일본 쯔구모 사람은 2.51, 연바이칼 사람은 1.65, 자바이칼 사람은 0.79인데 평균관계편차가 0.4보타 클 때는 통계학적으로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형성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본토기원설은 북방이나 남방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이나 전파된 문화가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민족과 문화의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는 견해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외부지역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몽골 문화 가운데 우리 것과 유사한 것이 많으며 외모나 체격 등도 한민족으로 혼동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이를 두고 우리 조상들이 몽골 지역에서 이주해 왔기 때문이라고 통설적으로 설명하는데 단국대학교의 윤내현 박사는 이를 역으로 설명한다.
몽골 지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흉노가 거주했는데 이들은 중국과의 치열한 패권 장악을 위해 싸우다가 중심부에서 세력을 떨친 보르치긴족으로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다. 현재 몽골의 주력 주민들도 보르치긴족이다.
그런데 보르치긴족은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으로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 동부여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 몽골에 거주하는 주류 종족인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우리 조상들과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분지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토기원설은 고인돌과 벼농사가 남방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에도 모순점을 지적한다. 남방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연대를 너무 낮게 추정하고 다른 나라의 고인돌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벼농사도 매우 늦게 시작된 것으로 인식했는데 구석기시대의 야생볍씨와 신석기시대의 재배볍씨가 출토되었고 고조선시대에 이미 벼농사가 널리 행해졌던 것으로 볼 때 설사 고인돌과 벼농사가 남방에서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갖고 우리 민족이나 문화의 주류가 남방에서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설명도 있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 황석리 인골은 한국인의 단두형에 비해 초장두형으로 유럽인의 특징을 갖고 있다. |
안승모 박사는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출현하는 곳은 대동강유역, 한강유역, 금강유역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지역이지만 한반도에는 야생벼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의 도작이 중국 쪽에서 서해안으로 건너온 것은 분명하다는 주장했다. 중국의 경우 도작은 장강유역(長江流域)에서는 기원전 7~5천년 이전, 회하유역(淮河流域)과 황화중류(黃河中流) 기원전 5천 년과 4천 년, 산동반도(山東半島)는 기원전 3천 년에 출현하여 장강(長江)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왕웨이 교수는 한반도는 벼의 원산지가 아니며 중국으로부터 벼농사 기술이 전래되었다는 것이 농학자들의 비교적 일치된 견해라고 적었다. 그는 한반도로의 벼농사 기술 전파 경로를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① 서해를 사이로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장강 하류에 위치한 장쑤, 상하이, 저장 일대에서 한반도로 전래
② 한반도와 접근해 있는 황하의 하류 산둥 반도와 발해에 접한 라오둥 반도의 남단에서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으로 전래
③ 중국의 푸젠과 타이완 일대로부터 해류를 따라 한국으로 전래
중국 회하의 이북 지역에서는 ‘찰벼’를 재배하고 중국 화난 지역 및 동남아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메벼’이다. 반면에 중국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메벼와 찰벼 두 종류를 다 재배하고 있다.3)
그런데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약 1만500년 전)보다도 약 3천 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
영국 BBC 방송의 인터넷판에도 이융조 교수가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견한 59개의 고대 탄화(炭化) 볍씨는 탄소연대측정법에 의거 1만5천 년 전의 볍씨임이 증명되었다고 보도했는데 `소로리 볍씨(재배벼 이전의 순화벼)’의 유전자구조는 현재의 야생벼-재배벼와는 39.6퍼센트의 낮은 유전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소로리 볍씨에 대해 정수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4)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원조 벼에는 ‘오리사 글라베리아 에스’(Oryzq glaberrima S. 서아프리카벼)와 ‘오리사 사티바 엘’(Oryza sativa L. 아시아벼)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나, 후자의 기원지에 관해는 이론이 분분한데, 인도의 서북부 아샘지대와 중국 남부 윈난(운남:雲南)지대를 아우르는 이른바 ‘아샘·윈난지대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시아벼는 다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양쯔강 이남지역에서 재배하는 인디카(인도형 메벼)와 양쯔강 이북과 한국, 일본 등의 동북아시아 일원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일본형 찰벼)로 대별한다. 그밖에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재배하는 자바형이 있다. 형태상으로 인디카는 좀 길쭉하다고 하여 장립형(長粒形)이라 하고, 자포니카는 단립형(短粒形)이라고 한다.
소로리 볍씨. |
그런데 이제 길고 짧은 형태가 섞여있는, 가장 오래된 소로리볍씨가 등장했으니, 이상의 통설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행여 ‘소로리카(Sororica)’로 태어나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계통상 뿌리가 아니될런지 두고 볼 일이다.’
원래 벼는 남북 위도 40도 이내에서 연중 서리 없는 날이 150일 이상인 고온다습한 고장(연강수량 1,000~1,200밀리미터)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나, 오랜 경작과정에서 변이(變異)가 생겨 지금은 그런 지리조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설명된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메벼와 찰벼가 서로 다른 분류 계통이고, 히말라야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는 두 지역의 지정학적인 요인을 감안하여 각각의 독립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한다. 즉 벼는 인도와 중국, 두 곳에서 각각 기원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재배되는 벼는 중국에서 기원했다는데 무게를 실어주었으나 야생벼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윈난 지대의 문제점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에 연대가 가장 오래 된 도작 문화가 고작 4천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화의 발달로 보았을 때 윈난 지방의 도작 문화는 같은 시기의 다른 문화보다 훨씬 뒤처져 있으므로 재배벼의 기원지라고는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러므로 현재 학자들은 원난 지방보다는 후난성에서 발견된 볍씨들을(위찬옌 유적지에서 출토된 4톨의 쌀알 중 2톨은 야생벼이고 나머지 2톨은 인공재배 흔적이 역력하므로 재배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벼로 추정) 근거로 재배벼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약 9천 년 전으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많은 논쟁거리가 있는데 학자들이 메벼와 찰벼가 동일한 기원지에서 기원된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아직 확정을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류가 언제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는지도 정확하게 단정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벼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있지만 정수일 박사의 지적과 같이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고의 연대를 갖고 있는 것 등을 감안할 때 한반도의 벼가 반드시 중국 등지에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지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5)
지금까지의 견해는 문화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역시 지극히 일방적인 견해라는 것이다. 문화의 내용이 유목생산문화냐 농경생산문화냐를 구별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목문화의 군사-안보적 문화요소가 농경지대로 흘러 들어간 사례는 무수히 있다. 주채혁은 농경문화가 유목문화권에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오해는 역사가들이 주로 농경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
중국도 문화의 전파에 대해 과거에는 한국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윤내현 박사는 적었다. 중국에서 고고학이 도입된 1920년대에는 중국의 선사문화가 외부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식했으나 그후 연구가 계속되면서 그러한 인식이 잘못되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고(疑古) 학파와 신고(信古) 학파 사이의 논쟁으로 결국 신고학파가 승리했다. 중국의 선사문화는 중국 내에서 기원하였으며 그것이 고대문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각 선사문화도 종래에 인식됐던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한민족의 기원 즉 한민족의 뿌리에 대해서는 북방기원설, 남북혼합설, 본토기원설 등이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단원에서 다시금 거론한다.
<구태의연한 민족이 필요한가>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많은 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사에서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소련이 등장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중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봉건주의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등장한 소련은 이후 70여 년간 민주주의 진영과 함께 세계의 양대 축을 이루며 국제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모태가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전체주의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다고 복기대 박사는 설명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며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들의 민족을 단결시킨 것도 유태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계속 대를 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자부심이 근간이 되어 몇 백만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10억이 넘는 아랍과 당당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민족은 중요하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 변방사를 따지더라도 수많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점철되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중국에 동화되었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유명한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며 청나라를 건설하였지만 결국 중국에 동화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민족이 한반도를 근거로 해서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광복투쟁을 했던 것도 민족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면서 한민족끼리 뭉쳐 살고자 했던 염원을 잊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힘을 얻는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복기대 박사는 세계 4대 문명권이니 어떤 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문화를 이루었다는 것 등은 구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4대 문명이 형성된 시기에 그와 동일한 문명 수준이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존재했고 그 문화의 후예들이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 박사는 결론적으로 우리 한민족은 원래부터 고립된 민족이 아님을 강조했다. 먼 옛날부터 이땅에 살면서 주변지역의 문화 요소들 중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후대에 전하여 생활에 유용하게 전환시켰다. 또한 21세기는 국경이 없는 시대가 되어 국경이 사라져도 민족은 영원히 없어질 성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김수로의 허 황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갖고 왔다는 파사석탑, 석탑의 재료가 인도의 아유타에서 발견되는 파사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한민족은 두 갈래>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수한 한민족’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배운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의 단일민족국가로서‧‧‧.’
북한도 다음과 같이 한민족은 단일민족임을 강조한다.
‘한민족은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 땅에서 자기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단국대학교의 김욱 교수는 Y염색체를 이용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 갈래로 70~80퍼센트는 북방계이고 20~30퍼센트는 남방계이며 기타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고 발표하여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민족은 인구 숫자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방 아시아인이 주류이지만 남방계도 상당수로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고고학적 연구나 문화인류학적 연구 결과와도 합치한다는 지적이다. 김욱 교수가 발표한 한민족의 원류는 다음으로 요약된다.
‘동아시아인 집단 형성에 관한 과거 인류의 집단팽창 과정과 이동경로, 그 시기 등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류유전학자들이 지지하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가 중동을 경유해 인도 또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한 경우와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경유한 집단이 동남아시아 또는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했을 경우 두 방향을 추정하지만 어느 곳에 먼저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국 휴스턴대의 리 교수 등은 Y염색체 DNA 분석을 통해 약 6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 먼저 정착한 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무렵 동북아시아 및 시베리아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으며 중국 곤명대의 야오 교수도 mtDNA 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발표했다.
반면에 미국 애리조나 대학교의 해머 교수 등은 동아시아인의 집단형성은 더 복잡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추정했다. 그는 Y염색체 DNA분석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유전자 풀이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집단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Y염색체 DNA의 등장은 과거 인류의 진화과정과 이주경로, 부계혈족확인, 유전자감식 등에 획기적인 성과를 안겨주고 있다. Y염색체는 남자에만 존재하며 반드시 아버지를 통해 아들에게만 물려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Y 염색체는 일부 말단부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NRPY)이 X염색체와 교차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났던 돌연변이의 정보가 연관 상태를 유지한다고 김욱 교수는 설명했다.
여하튼 우리나라 집단은 동아시아인 집단 가운데서도 중국인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중국의 일부 남부인(예 : 묘족 등)과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일본인 집단은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인 및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는 약 2,300년 전 농경문화와 일본 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학적인 증거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것을 근거로 한국인집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경로 이상의 다양한 민족 집단이 혼합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었으며 유전적으로 하나의 민족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김욱 교수는 지적했다.
민족은 어느 한 시기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수한 시간적,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의 유전적 동질성과 동일한 언어, 문화적,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변한다. 지금까지 mtDNA의 분석결과로 볼 때, 한국인 집단에서는 동북아시아인 집단과 시베리아 집단에서 주로 관찰되는 하플로그룹(haplogroup, 같은 mtDNA 유전자 형을 가진 그룹) A, B, D, G, Y, Z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인 집단에서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하플로그룹 B, F가 모두 나타난다.
또한 Y 하플로 그룹의 빈도분포를 보면 한국인 집단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 집단 중에서도 중국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이며 중국의 일부 남부인(예 : 묘족 등)과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닌다고 발표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인집단이 동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의 유전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민족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은 단일민족이란 말에 어폐가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님에도 다른 민족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단일민족이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민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단일민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세계 문명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오지에서 지금까지도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이 아닌 한 역사의 여명기에 살았던 민족들이 서로 혼합되고 동화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1980년대 초에 누가 진짜 프랑스인인가를 호구 조사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정통 프랑스인은 적어도 부모와 조부모 모두 즉 3대가 프랑스인인 경우를 의미했다. 그런데 호구 조사는 전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정부가 호구 조사를 통해 프랑스인을 가린 결과 이 기준에 맞는 프랑스인들은 겨우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지엥, 1980년대 조사에서 적어도 부모, 조부모 즉 3대가 프랑스인인 경우 정통 프랑스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정했는데 이 기준에 맞는 프랑스인들은 겨우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
프랑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출생지주의(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자격을 획득)’를 채택하여 부모가 외국 국적일지라도 프랑스 국토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프랑스인이 된다(19세가 될 때 국적을 신청할 수 있음).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면 프랑스인이라고 볼 수 없는 8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고 콧대를 내세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만 보아도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야만 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구가 1일 생활권으로 들어 선 현대에서는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억지만은 아니다. 미국이 합중국이라 부르면서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의 많은 국가가 어느 민족의 나라라고 굳이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역으로 한민족의 구성원이 겨우 두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 보아 유례가 없는 일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수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하루가 달리 변하는 지구에서 지구적인 차원의 사고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까지의 설명은 한민족의 경우 ‘다지역기원설’, ‘자생기원설’로만 풀기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의 주장처럼 한반도에서 원인‧고인‧신인의 화석이 한반도에서 체계적으로 발견되었더라도 70〜100만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에 한반도에서 인류 이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한민족의 혈청학적 특징 등을 고려할 때 한민족이 다른 어떤 민족과도 다소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어떠한 경로로든 새로운 유민이 한반도에 정착하였더라도 선주민과 유이민 간에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융합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모순점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한민족의 경우 ‘아프리카 가설’과 ‘한반도 자생기원설’이 절묘하게 융합한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도전할 것으로 보이므로 이곳에서는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