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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의 족보열풍 | 한민족&한국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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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의 족보열풍

  • 글: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원문)

 

센 마리팀 도 알루빌-벨포스 코뮌의 혁명기 호적부

 

필자가 예전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놀란 것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인들의 족보연구 붐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역사를 좋아한다는 말은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역사학자가 아닌 많은 일반인들이 고문서보관소(archives)에 와서 고문서를 열람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보는 문서는 대부분 호적부이다. 참고로 호적은 불어로는 ‘에타 씨빌état civil’이라 하는데 ‘시민의 상태’라는 뜻이다.

프랑스에는 대부분의 지방 고문서보관소에 옛날 왕정시대부터의 호적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의 교구사제들은 오랫동안 교구민들의 세례와 결혼, 장례식 등을 집전하였는데 그 관련기록을 남겨온 덕택이다.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며칠 내로 교구사제에게 가서 유아세례를 받는다. 사제는 세례를 받는 아이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과 나이, 주소 등을 기록하였다. 사제에 따라 부모의 직업을 적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날짜가 기록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결혼도 교구의 성당에서 미사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랑, 신부의 이름과 나이, 직업, 주소 그리고 양측 부모의 이름, 또 결혼식 증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장례에 관해서도 교구신부들은 망자의 이름과 나이, 직업, 주소 그리고 매장날짜를 기록되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교구기록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오래 된 것은 중세시대인 14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대부분의 지방 고문서보관소에는 16세기 이후부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군주로 이름 높은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유명한 ‘빌레르-코트레 칙령’이 1539년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사에서 중요한 이 칙령은 행정, 사법문서를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기록하도록 규정하였을 뿐 아니라 교구사제들이 반드시 교구에서 일어난 출생과 사망 및 혼인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고 보관하도록 의무화 하였다. 이 때 비로소 프랑스인들의 호적제도가 국가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크게 축소한 프랑스혁명 이후 교구사제들 대신 각 시와 마을의 시장(maire)이 호적업무를 맡게 되었다. 왕정시대부터의 이러한 옛 호적부는 전쟁이나 화재 등으로 파괴되지 않는 한 지방 고문서보관소에 가면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선조가 어느 교구에서 언제 태어났는지 알면 그 그 선조의 호적기록을 찾고 또 그 선조의 부모가 누구인지 대체로 추적할 수 있다. 선조들이 다른 곳에 이주하지 않고 오랫동안 같은 교구에 살았다면 조상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교구의 호적부를 열심히 뒤져보면 선조들 기록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십 년간의 호적부를 뒤져보는 것이 인내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은 적지 않은 경우 호적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선조들을 찾아 수 세대 간의 가계도를 작성할 수 있다.

프랑스 대부분의 도(département)마다 있는 지방 고문서보관소 열람실에서는 사료를 놓고 씨름하는 역사전공 대학원생들이나 학자들보다는 호적부를 뒤적이고 있는 일반인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일반인들에서는 은퇴해서 시간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조상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또 누구를 낳아서 자신에게까지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는지 탐색하는 족보연구는 아주 재미난 일이다. 그래서 고문서보관소에 일반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또 이들의 많은 수는 족보연구 클럽에 가입한다.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위해 자주 가던 루앙의 센마리팀 도(道) 고문서보관소에도 이런 노인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분은 거의 매일 그곳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여 필자와 안면을 텄는데 루앙 시의 족보연구 클럽 회장님이었다. 그 영감님은 자신은 이미 자기 조상들을 다 찾았기 때문에 다른 회원들을 위해 호적부를 열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족보 클럽은 프랑스에서 엄청나게 많은데 회원들을 위해 고문서와 역사에 관한 여러 가지 강의도 개설한다. 특히 ‘팔레오그라피paléographie’ 즉 손으로 기록된 고문서의 글자를 읽는 법은 족보연구에서 필수적인 지식이라 중요시된다. 클럽에서는 지역의 역사학 교수들을 고문으로 초빙하여 도움을 받기도 한다. 교수님들은 호적부를 뒤지는 아마추어 역사가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마추어 역사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한다. 아마추어 역사가들은 일반 역사학자들이 조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세세한 호적기록들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기업가 가문이나 귀족 가문의 경우는 후손들의 족보연구가 역사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데 필자 역시 노르망디 신교도 기업가들을 연구하면서 그 후손 한 분이 조사해놓은 족보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최근에는 상당한 호적들이 디지털화 되어 컴퓨터를 통해 가까운 시대의 조상들에 관한 기록을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료들을 이용하여 조상찾아주기 사업을 하는 인터넷 사업체들도 많이 생겨났다.

개인 입장에서 볼 때 조상 찾는 일에 호적문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역사학에도 호적부는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신생아와 사망자 수 그리고 결혼건수는 인구통계학(démographie)의 기초정보이다. 이를 수백년간 추적하여 모으면 훌륭한 시계열자료가 만들어진다. 20세기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인구통계학 자료를 기초로 인구의 장기적 변동을 연구한다. 인구변동은 물가나 토지가격, 지대 등에 영향을 미쳐 사회변화를 초래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인구통계를 기반으로 장기적 사회변동을 연구한 것이 20세기 프랑스 역사학을 주도한 ‘아날 학파’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아날(Annales)이라는 말은 연보(年譜)라는 뜻인데 이 학파에서 만들어낸 학술지 사회경제사연보 《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의 앞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제법 소개가 되어 있는 마르크 블로크와 뤼시앙 페브르 두 사람이 1929년에 창건한 잡지로 현재는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번역하자면 ‘역사·사회과학연보’라 하겠는데 이 새로운 이름에서 우리는 역사학에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광범하게 도입하려는 이 학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현재 파리에는 이 학파의 사람들이 세우고 주도하는 유명한 특수대학원이 있다. 파리에 있는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즉 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EHESS)이 그것으로 수백 명의 교수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역사학자들이다.

선조들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호적부와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사료는 공증인(notaire) 문서이다. 우리나라에는 공증인제도가 발달되지 않았지만 상업과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발전했던 유럽에서는 중요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효력을 보증하기 위한 공증인제도가 널리 행해졌다. 상속과 관련해서도 공증인이 큰 역할을 하였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 죽으면 그 유산목록을 작성하는데 바로 공증인이 그 목록을 작성하고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 문서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문서인데 이를 바탕으로 상속이 이루어지고 또 상속세가 부과되었다. 공증인 문서 역시 수 세기 전의 것부터 고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공증인이 작성한 유산목록에는 망자의 인적 사항뿐 아니라 그 유산을 아주 세세한 항목까지 조사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망자의 생활수준과 재산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상인이나 기업가의 경우 우리가 그 유산목록을 통해 사업의 종류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어 사회경제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사료가 된다.

서양 족보 이야기와 나온 김에 하나 더 추가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몰몬교의 족보 수집이다. 몰몬교는 우리나라의 소위 기독교 정통교단에서는 이단으로 치부되는 교단이지만 필자 같은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아주 흥미를 끄는 집단이다. 몰몬교는 과감하게 기존의 교리와 다른 독창적인 교리를 만들어내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교회제도를 만들어내었다. 예를 들어 몰몬교에는 별도의 성직자집단이 없다. 일반신도들이 돌아가며 성직을 맡기 때문이다.

몰몬교는 1830년 미국의 조셉 스미스라는 인물이 계시를 받아 창설한 교단으로 19세기에는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지금은 서부의 유타 주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몰몬교는 조셉 스미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기록을 번역하여 만들었다는 《몰몬경》이라는 제2경전도 만들었지만 교리도 일반 기독교와는 다른 점이 많다. 이들에게는 ‘대리침례’(proxy baptism)라는 독특한 교리가 있다. 죽은 조상의 구원을 위해 후손이 자신의 죽은 조상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것이다. 죽은 조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도 놀랍지만 이러한 대리침례를 위해 전세계에서 족보와 족보 관련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하고 있다. 죽은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대리침례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몰몬교에서는 이러한 기록들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을 운용하고 있는데 ‘가족사박물관Family History Library’이다. 솔트레이크 시에 있는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제일 큰 족보박물관이라 한다. 또 근처의 산에다 큰 동굴을 뚫어 세계도처에서 찍어온 족보관련 마이크로필름을 보관하기 위한 보관소도 운용하고 있다. 족보가 잘 만들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가문들 족보도 이미 수십년 전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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